[기고] 차 한 잔, 마음을 여는 가장 따뜻한 언어
강민구 前 창원‧부산 지방법원장
- 2026.05.12 제 47 호
본문
차 한 잔, 마음을 여는 가장 따뜻한 언어
강민구
前 창원‧부산 지방법원장
스물한 번째 봄, 가마솥 앞에서
해마다 4월 말이 되면 저는 어김없이 하동으로 내려갑니 다. 올해로 꼭 스물한 해째 이어지는 연례행사입니다. 전 날 갓 따낸 싱그러운 찻잎을 300도가 넘는 미니 가마솥 에 덖고 비비기를 서너 시간, 자연 건조에 가향(加香)까 지을 마치고 나면 1킬로그램의 생찻잎이 겨우 200그램 의 고품질 녹차로 다시 태어납니다.
찻잎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수분을 내어 놓고, 푸른 기운 을 덜어내며 깊은 향을 품어 가는 과정은 과학인 동시에 신비 그 자체입니다. 내가 마실 차를 내 손으로 덖어 본 사람만이 아는 그 남다른 기쁨, 저는 해마다 봄마다 새 로 배웁니다.
녹차에 덧씌워진 오해를 벗기며
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는 녹차에 대한 오해가 아직 깊게 남아 있습니다.
첫째는 2007년 무렵의 이른바 '농약 녹차 파동'입니다. 한 방송의 대대적 고발 이후 하동, 보성, 제주 농가의 판매량은 곤두박질쳤고, 그 여파는 지금껏 가시지 않았습니다. 그러나 뒷날 밝혀진 진실은 달랐습니다.
문제의 녹차는 일부 티백 제품이었고, 그 원료의 대부분 이 저급 중국산이었던 것입니다. 정성 들여 우리 찻잎을 길러 온 농가들이 그저 억울한 피해를 입은 셈이지요.
둘째는 '녹차가 몸에 해롭다'는 극단적 주장입니다. 그러 나 세상 어느 음식이든 지나치면 해로운 법이요, 정량을 지키면 독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.
셋째는 '녹차가 냉하여 몸을 차게 한다'는 속설입니다. 제 대로 덖은 녹차는 제다 과정에서 찬 성질이 상당히 누그 러집니다. 체질에 맞지 않는 분들께는 발효차인 황차나 떡차, 중국의 보이차 같은 후발효차를 권해 드립니다. 커 피나 녹차의 카페인으로 잠을 설치는 분들도 발효차를 드시면 한결 편안해지는 것을 쉬이 느끼실 수 있습니다.
찻잎 속에 담긴 오래된 지혜
미국 타임지는 이미 오래전 그린 티(Green Tea)를 세계 10대 건강식품의 하나로 선정한 바 있습니다. 지난 코로 나 3년 동안에도 유럽의 여러 매체는 동양의 녹차가 면 역 유지와 증강에 의미 있는 효과가 있다고 거듭 보도했 지요. 다만 우리 언론은 이 소식을 거의 다루지 않아 아 쉬움이 남습니다.
우리 선조들은 고려와 조선 내내 차와 더불어 살았습니 다. 조선 사헌부에는 '다시(茶時)'라는 제도가 있어, 조회 와 퇴청 종례 때 반드시 큰 사발에 녹차를 한 잔씩 우려 함께 나누었다고 실록은 전합니다. 임금도 국문장에서 물러 나오면 고관들과 차 한 잔을 나누며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합니다. 하루의 시작과 끝머리에 차 한 잔을 두는 마음, 그것이 곧 나라의 품격이었던 것입니다.
재판정에서 피어난 차향의 기적
제가 차 마시는 습관을 이토록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, 이 작은 의식이 재판정에서도 큰 힘을 발휘해 왔기 때 문입니다.
법정에서는 차를 권할 수 없지만, 조정기일에 당사자와 대리인을 재판장실로 모실 때면 저는 꼭 녹차 한 잔을 직 접 우려 드렸습니다. 처음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분들의 얼굴에는 '절대 양보하지 않겠다'는 빗장수비의 결기가 어려 있습니다. 그런데 따스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한 모금 머금는 순간, 그 심리적 무장이 서서히 풀립니다. 마음이 열리고,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는 역지사지의 자 세로 조금씩 돌아서는 것이지요.
2005년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부 재판장 시절의 기 억이 특히 생생합니다. 일본 농약 회사가 우리 기업을 상 대로 제기한 거액의 국제 제초제 특허권 침해 소송이었 습니다. 조정을 위해 양쪽 회사 중역과 대리인을 모두 재 판장실로 모시고, 제가 직접 덖은 하동 녹차를 서너 잔 나누며 15세기 이후 한·일 녹차 교류와 이도다완 찻잔에 얽힌 이야기를 15분쯤 조용히 풀어 드렸습니다.
한참을 듣고 계시던 일본 측 중역 한 분이 말씀하셨습니 다. "차를 아시는 재판장께서 국수적인 편파 판결을 하실 리 없으니, 생각하시는 중재안을 주십시오." 바로 그 순 간을 기다려 온 제가 준비해 둔 합리적인 조정안을 내놓 자, 본사 회장의 승인이 불과 20여 분 만에 떨어졌습니 다. 수년간 공방을 거듭하던 국제 특허 분쟁이 전통 녹차 한 잔으로 상호 교감의 문이 열려 원만히 매듭지어 진 것입니다.
다시, 차 한 잔을 권하며
2009년 통계에 따르면, 국민 1인당 연간 잎차 소비량은 한국 0.1킬로그램, 중국 0.8킬로그램, 일본 1킬로그램, 영 국 1.9킬로그램이라고 합니다. 물 맑은 금수강산의 후손 이 정작 차와 가장 멀어져 있는 셈이지요.
일방적 주장이 난무하는 유튜브와 짧은 영상의 홍수 속 에서 우리는 너무도 쉽게 휩쓸리곤 합니다. 이럴 때일수 록 아날로그의 깊이를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요. 차 한 잔 을 매개로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, 오해 는 저절로 풀리고 창의적인 생각이 오가며 우애와 우정 이 돈독하게 쌓입니다. 차는 관계를 여는 가장 따뜻한 언 어이자, 나라의 생각 근육과 지혜 총량을 끌어올리는 특 급 촉진제입니다.
저는 아침 출근 때는 손수 내린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을, 그 후로는 주로 녹차를 곁에 둡니다. 커피에는 커피의 미 덕이 있고, 차에는 차의 고요가 있는 법이지요. 방문객이 오시면 손수 차 한 잔을 우려 나누는 일은 어느덧 제 삶 의 한 자락이 되었습니다. 4월의 제다 여행은 저의 생명 이 다하는 그날까지 이어질 것이고, 차를 나누는 이 버 릇 또한 기운이 남아 있는 한 계속될 것임을 스스로 다 짐합니다.
부디 여러분도 일상의 한 귀퉁이에 차 한 잔을 들여 보시 기를 권합니다. 심신의 건강은 물론이요, 오래 잊고 지낸 마음의 평정과 사람 사이의 온기까지 함께 되돌아올 것 입니다. 먼저 그 세계에 푹 빠져 본 사람으로서, 이 좋은 차향의 세계로 여러분을 간절히 초대드립니다.